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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128X188 | 200쪽 | ISBN 978-89-325-0222-9
    세계관적 성경읽기 -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
    지은이 : 전성민 | 202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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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 책 소개
예배당을 벗어나 세상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사랑과 감사, 겸손과 대화의 세계관 이야기

 

혐오와 차별, 독선과 대결의 근본주의 신학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퍼지고 있다. 전성민 교수는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실패 이유를 진단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다섯 가지 방향을 제자도, 삶의 자리, 세계관, 복음, 사명과 관련해 제시한다. 예배 중독자 사울, 경계를 넘는 에스더, ‘아담’인 하와, 광장에 선 바울 등의 이야기를 통해 21세기 한국 기독교라는 콘텍스트에 대한 깊은 고민을 성경 텍스트에 밀착해 풀어낸 『세계관적 성경 읽기』는 한국 기독교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2. 차례
들어가는 말    

 

제1부. 세계관적 성경 읽기란?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

1.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을 찾아가는 성경 읽기    
2.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며 대화하는 성경 읽기    

 

제2부.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

 

지성 너머 욕망의 제자도
3. 봄이 아픈 사람들과 부르는 노래    
4. 예배 중독자 사울    

 

중심이 아닌 경계의 삶
5. 변두리에서 만들어지는 세계관    
6. 경계를 넘는 에스더    

 

혐오를 이기는 환대의 복음
7. 혐오와 환대의 갈림길에서    
8. ‘아담’인 하와    

 

대결이 아닌 대화의 세계관 
9. 겸손, 사랑, 감사의 세계관    
10. 광장에 선 바울    

 

교회 너머 인류를 위한 사명
11. 예배당에 매이지 않는 기독교    
12. 기독교 세계관은 평화의 세계관이다    

 

주    
참고문헌    


3. 지은이 소개

전성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 세계관 및 구약학 교수.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 칼리지에서 성서언어(M.C.S.)와 구약학(Th.M.)을 공부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구약 내러티브의 윤리적 읽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D.Phil.)를 받았으며, 2014년 한국인 신학자로는 최초로 학위 논문이 옥스퍼드 신학 및 종교학 단행본 총서로 출판되었다(Ethics and Biblical Narrative). 『세계관적 설교』, 『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상 성서유니온)를 저술했으며, Ecclesia and Ethics: Moral Formation and the Church에 기고한 기드온 이야기의 윤리적 읽기를 비롯하여, 구약성경을 통해 한국 교회의 윤리적 문제를 성찰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2005년부터 8년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을 가르쳤고, 2013년부터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일하고 있다.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창립 연구위원이었으며, 캐나다로 일터를 옮긴 후로는 초빙연구위원으로 섬기고 있다. 전문영역인 구약 윤리 외에 평신도 신학, 세계관적 성경읽기와 설교, 미션얼 운동의 구약적 토대, 성서학과 과학의 관계 등에 관심이 많으며, 유튜브 <민춘살롱>을 통해 이러한 관심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 있다.

 

4. 본문 중에서

성경읽기의 활력은 성경 텍스트 자체에 몰두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성경읽기의 활력은 콘텍스트를 예민하게 성찰하고 콘텍스트와 대화할 때 생기기 시작한다. 최종원은 콘텍스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처한 문제들을 만날 때, “성경적 근거”를 찾겠다는 구실 아래 텍스트 뒤에 숨어버리는 태도를 비판한다. 그는 콘텍스트를 읽고 씨름하지 않고 텍스트에 매몰되는 것을 신앙이 세상과 소통되지 못하는 이유로 지적한다. 텍스트에 대해 고민하는 만큼, 아니 그 고민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콘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려 애쓴다면 신앙과 세상이 단절되는 일은 덜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렇게 콘텍스트를 읽고 씨름하며 생긴 질문을 품고 다시 텍스트로 돌아올 때, 세상의 문제들과 관련해 우리의 욕망, 삶의 자리, 세계관, 복음, 사명을 다시 되짚어 보게 하는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텍스트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_1.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을 찾아가는 성경읽기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좋으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긍정하며 타자와 겸손히 대화하는 성경읽기”다. 이러한 성경읽기가 우리의 세계관을 변화시킨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성경을 “자기 확신 강화제”로 사용하게 된다. 성경을 읽을수록 내 생각과 삶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빙자해 이미 가지고 있던 생각을 더욱 고집하게 된다. 특히 세계관을 강조하는 성경읽기는 세계관이라는 개념이 지닌 전체주의적 위험성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성경을 자기 확신 강화제로 사용하게 될 위험이 더욱 높다. 또한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자기중심성을 넘어 세계에 몸을 담그는 성경읽기”다. 이러한 성경읽기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변화시킨다. 성경읽기는 인격적(personal)이지만 공적인(public)한 행위다. 그래서 성경읽기는 골방에서 벌어지는 사사로운(private) 행위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골방의 사사로운 행위로 끝나는 성경읽기는 자기중심성에 매몰된 타락한 성경읽기다.
_2.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며 대화하는 성경읽기

 

사그라지는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여러 예배 행위에 몰두했던 사울에게서 감히 “예배 중독”이라 이름할 만한 모습을 본다. 사울은 사무엘상 13-15장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여러 예배 행위를 한다. 그런데 그런 예배 이야기로 가득 찬 13-15장은 사울의 치명적인 잘못을 고발한다. 그가 욕망을 위해 예배했기 때문이다. 13장에서 사울은 점점 줄어드는 사람들을 보며 초조해하다가 스스로 번제를 드렸다(13:8-9).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예배가 아니라 사람을 묶어 놓기 위한 예배였다. 15장에서는 아말렉과 전쟁할 때 모든 것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제사한다며 양과 소를 살려두었
다(15:9). 이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신의 승리를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이 모든 것은 치명적인 잘못이었다. 그 결과 사울은 사무엘에게서 왕조가 멸망한다는 예언을 듣고(13:14)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책망과 함께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15:22-23). 얼핏 보기에 사울은 예배를 귀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망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13, 15장과 더불어 14장에서도 찾아보자. 
_4. 예배 중독자 사울

 

어떤 세계관이 성경 전체의 전망에 잘 어울리는 성경읽기를 가능하게 할까? 우리에게는 온 세상을 품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완결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필요하다. 더불어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님의 갈릴리 변두리 삶, 성문 바깥 십자가에서의 죽음, 여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부활의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런 중심이 아닌 경계 너머 변두리야말로 성령께서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각을 주시는 자리다. 그런 자리에서 세계관이 만들어질 때, 우리 삶의 자리와 방향은 예수님의 것을 닮게 된다.
_5. 변두리에서 만들어지는 세계관

 

중심에 서서 중심이 부여하는 힘을 통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심을 향한 욕망을 포장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는 중심의 힘을 선망하는 대신 주변적 일상을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돕고 나누는 공동체를 경험할 때, 예수께서 왜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두리 갈릴리에서 살아가셨는지 그 비밀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다. 에스더 같은 왕후가 되어야 세상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중심에서 베푸는 ‘영향력’을 장착하느라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고 구하는 일은 무한히 미루어진다. 그리고 설령 그런 영향력을 지니더라도, 그것은 왕궁의 방식으로 옷을 갈아입히는 피상적이고 사적인 영향력에 머무르기 쉽다. 중심을 맴돌며 경계를 한 발자국도 넘지 않는 왕궁의 시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못한다. 에스더 이야기는 왕궁의 삶을 욕망하는 우리에게 에스더처럼 경계 바깥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내어 보라고 격려한다. 경계 바깥의 삶을 말해 주는 모르드개가 되어 보라고 도전한다. 우리의 성경읽기는 바로 그 격려와 도전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_6. 경계를 넘는 에스더

 

창세기 2:18의 번역을 비교해 보면, 새번역은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개역개정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남자”와 “사람” 모두 히브리어 ‘아담’을 번역한 것이다.
  새번역과 개역개정의 번역이 다른 이유는 ‘아담’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한 특정 남자의 이름뿐 아니라 성별과 관계없이 일반적인 ‘사람’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 5:1)라는 구절 처음에 나오는 사람 이름 “아담”과 다음에 나오는 일반 명사 “사람” 모두 히브리어로는 ‘아담’이다(새번역 5:2의 난외주 참조). 이런 사실은 창세기 1:27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본문에서 “사람”은 히브리어 ‘아담’의 번역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NIV는 27절에서 ‘아담’을 ‘인류’(mankind)로 번역했다. 요컨대 여자도 ‘아담’이다!
_8. ‘아담’인 하와

 

비그리스도인과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노예벨의 전쟁이 아닌 사이어의 ‘답정너’ 대화도 아닌, 온유하고 겸손한 대화가 기독교 세계관이 추구해야 할 길이다. 이런 점에서 윌킨스와 샌포드가 겸손, 사랑, 감사를 “기독교 세계관의 목표이자 발전 지표”로 제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비기독교적인 세계관들에서 하나라도 진리의 조각을 발견해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더 예수의 성품을 배우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통찰력으로 다른 모든 사상 체계를 지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탄탄한 기독교적 사상 체계”가 아니라 겸손, 사랑, 감사의 태도다. 
  설령 소위 ‘세계관 전쟁’을 치러야 한다 해도, 그 전쟁은 거짓과 혐오로 점철된 무례함을 통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영적 십자군 의식”은 그리스도를 오해하게 만들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본받아야 한다. 온유가 교만을 이긴다. 죽임당한 어린양이 역사의 주인이 되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그 증거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기 위해 대결이 아니라 대화하는 겸손, 사랑, 감사의 세계관을 익힐 것이다.
_9. 겸손, 사랑, 감사의 세계관

 

신앙은 교회의 부흥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번영을 추구한다.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함께 살아야 할 공동체며, 하나님은 인류의 번영 자체를 바라고 기뻐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온 인류의 번성한 문화로도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창 1:28; 사 60:4-9; 계 21:24-27). 우리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일 뿐 아니라 한 사회의 시민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의 건강을 위해 예배당에 “모이지 않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교회는 예배당에 매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실 때 그들의 모임이 교회며, 예수님은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처럼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 끝까지 움직이신다(요 2:8; 행 1:8). 그래서 우리는 길 위에서 그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간다. 더 이상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영과 진리만이 문제다(요 4:21-24). 이것이 우리가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해야 하는 이유다.
_11. 예배당에 매이지 않는 기독교

 

과연 한국 교회와 복음주의는, 아니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회복하고, 사랑을 어떻게 실현하며, 그 사랑의 실현을 위해 어떤 희생을 할 것인가. 꽤나 막막하고 추상적인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은 각 사람, 각 공동체, 각 세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방식이 되었든 희생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회복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나의 방식은 평화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이 나의 신앙의 힘과 기둥이 되고, 그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모습을 평화라는 화두에서 찾아보려 한다. 우리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이고, 십자가는 평화를 만든 십자가며, 우리는 평화의 제자로서 교회와 세상에서 평화를 세워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가운데 우리의 미래는 비로소 싹을 틔우기 시작할 것이다. 
_12. 기독교 세계관은 평화의 세계관이다

 

5. 출판사 리뷰
『세계관적 설교』에 이은
전성민 교수의 두 번째 세계관 이야기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세계관적 설교』(성서유니온)에 이은 전성민 교수의 두 번째 세계관 이야기다. 3년 전에 『세계관적 설교』를 출간하면서 전성민 교수는 세계관에 대한 두 번째 책을 쓴다면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다섯 가지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보고 싶다고 했다. 그 다섯 가지 방향은 “지성의 제자도에서 욕망의 제자도로”, “중심의 삶에서 경계의 삶으로”, “대결의 세계관에서 대화의 세계관으로”, “혐오의 율법에서 환대의 복음으로”, “교회의 성장에서 인류의 번영으로”였다. 

  『세계관적 성경읽기』는 1부에서(특히 1장에서) 왜 이 다섯 가지 방향을 ‘복음주의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방향으로 제안하게 되었는지 밝히고, 2부에서 그 다섯 가지 방향이 성경과 얼마나 어떻게 공명하는지 확인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살피는 성경 본문은 독자에게 작지 않은 깨달음과 통찰을 안기곤 한다. ‘예배 중독자 사울’은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신앙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될 수 있는지 보게 하고, ‘경계를 넘는 에스더’는 언제나 중심에 서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마주하게 한다. ‘광장에 선 바울’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신념이 우리를 얼마나 독선적이게 하고 세상과 불통하게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래서 전성민 교수는 우리의 신앙이 예배당을 벗어나 세상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우리의 세계관이 대결하는 세계관이 아닌 겸손, 사랑, 감사의 세계관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를 “기독교 세계관은 평화의 세계관이다”라는 주장으로 마무리하는데, 의도치 않게 『세계관적 설교』와 『세계관적 성경읽기』 모두 마지막 장이 평화에 관한 것이 되었다. 만약 전성민 교수가 세계관에 대한 책을 또 쓴다면, 그 때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제시한 “기독교 세계관은 평화의 세계관이다”라는 주장을 더 상세히 풀어내리라는 기대 섞인 예상을 해본다.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라는 이 책의 부제를 보고 최종원 교수의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홍성사)를 떠올리는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는 부제와 제목의 유사함 때문만이 아니라, 최종원 교수의 책에서 다루는 “한국 교회를 넘어선 보편 교회”, “배제와 혐오를 넘어선 포용의 공동체”, “개인 신앙을 넘어선 공적 신앙” 등의 주제와 『세계관적 성경읽기』에서 다루는 다섯 가지 방향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전성민 교수는 ‘텍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복잡하고 어려운 콘텍스트의 문제를 회피하는 핑계이고,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이 세상과 연결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최종원 교수의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 나아가는 움직임 없이 텍스트에 매몰되는 것은 자폐적이고 게토화된 신앙을 만들어 낼 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또한 콘텍스트에서 생긴 질문을 품고 텍스트를 읽을 때에만 텍스트가 살아난다고도 말한다. 그래서 “세계관적 성경읽기”라는 제목에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라는 부제가 붙은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는 혐오와 차별, 독선과 대결의 근본주의 신학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퍼지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실패 이유를 진단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다섯 가지 방향을 제시하는 『세계관적 성경 읽기』는, 21세기 한국 기독교라는 콘텍스트에 대한 깊은 고민을 성경 텍스트에 밀착해 풀어낸 책이기에, 한국 기독교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고 나아갈 바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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